20210227(토) 오늘의 클럽에반스 공연 : 송현우 밴드
한국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찍는다 - 조선일보
문화소식    2010.02.03 (Wed)

한국 재즈 1세대들의 음악과 인생을 영화로
재즈팬들이 의기투합 제작비 직접 마련해
"돌아가신 선배들생전에 찍었더라면…"

테너 색소폰의 마우스피스가 덥수룩한 수염을 헤치고 김수열(70)씨의 입술에 닿았다. 이윽고 그의 선율이 클럽 안을 휘감아 돌자, 노(老) 연주자는 눈을 감고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와 50년을 동반해 온 황금색 악기는 여전히 스무 살 연인처럼 반짝였다. 이어 최선배(66)씨의 트럼펫이 자지러질 듯 울어제치고, 클라리넷을 쥔 이동기(72)씨는 박자를 세며 자신의 연주 순서를 기다렸다. 그 뒤에 75세 드러머 조상국씨가 스틱 두 개에 몸을 맡긴 채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김준(69)씨가 마이크를 들어 입을 뗐다. "플라이 미 투 더 문/ 앤 렛 미 플레이 어몽 더 스타즈…." 이 광경을 카메라 4대가 각기 다른 앵글로 기록했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이들은 모두 뮤지션들의 아들·딸뻘이었다.

이 영화를 '한국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일 낮 서울 이태원동 재즈클럽 '올 댓 재즈'에서는 한국 재즈 1세대들의 음악과 인생을 담은 영화 '더 콘서트(가제)'가 한창 촬영 중이었다. 지난 14일 크랭크인한 이 영화는 1950년대부터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해 온 음악인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다. 이날 촬영은 5회차로, 각 뮤지션들의 인터뷰에 삽입할 공연 장면 부분이다.

50년 넘게 재즈를 연주해 온‘한국 재즈 1세대’뮤지션들의 음악과 삶을 담은 영화‘더 콘서트’가 본격 촬영을 시작했다. 28일 이태원 재즈클럽‘올 댓 재즈’에서 뮤지션들의 공연 장면을 촬영하는 모습./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감독은 재즈평론가 남무성(41)씨. 그는 '재즈 잇 업(Jazz it up)'이라는 재즈사 만화책 시리즈를 한국과 일본 베스트셀러에 올린 만화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어제 새벽 4시까지 촬영을 했는데, 너무 뛰어난 장면을 찍게 돼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며 들떠 있었다.

남 감독이 이 영화를 구상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이분들은 평생을 재즈에 바친 분들인데 일반인들은 그 존재조차 모릅니다. 이들을 오랫동안 봐 온 제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죠."

머릿속에만 있던 영화가 실제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한국 최고의 재즈이론가 이판근(74)씨의 서울 역촌동 작업실이 재개발 때문에 헐리게 됐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다. "그곳은 말 그대로 한국 재즈의 산실입니다. 한국의 모든 정상급 재즈 연주자는 전부 그곳을 거쳐 갔죠. 헐리기 전에 서둘러 찍어야 했어요." 그는 일단 자기 돈 1000만원을 제작비로 내놓고, 재즈애호가인 친구 황태연(41)씨도 '장가 밑천' 2000만원을 투자하며 공동제작자로 참여하고 다른 투자자를 물색해 왔다. 영화 포스터와 모든 사진은 사진작가 노상현(36)씨가, 각종 궂은일은 친구 윤인성(41)씨가 맡아 '재즈팬들이 만드는 재즈 영화'가 됐다. 제작비는 남 감독의 '재즈 인맥' 덕에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날 촬영장소인 '올 댓 재즈' 역시 오전 10시부터 무료로 제공받았다.

영화는 이날 촬영분에 등장한 사람들 외에 강대관(트럼펫), 강태환(색소폰), 류복성(퍼커션), 박성연(보컬), 이판근(재즈이론)씨 등 한국 재즈를 개척한 사람들을 담을 예정이다. 남 감독은 "이들의 삶보다는 이들 음악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라고 말했다.

영화 연출을 맡은 재즈평론가 남무성씨(가운데)가 최선배 김준 김수열(왼쪽부터)씨와 촬영에 앞서 상의하고 있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이날 드럼을 연주한 조상국씨는 1986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갔으나, 최근 한국에 들른 길에 영화에 참여하게 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교민 상대로 음악을 계속 하고 있다는 그는 이날 멤버들과의 협연이 20여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재즈 1세대' 중 몇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준씨는 "벌써 찍었어야 할 영화인데, 돌아가신 선배들이 이 영화에서 한 말씀씩 했어야 했는데…"라고 했다. 최선배씨는 "홍덕표(트롬본·2007년 작고), 최세진(드럼·2008년 작고) 같은 분들이 살아계실 때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젊은이들이 영화를 만들겠다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연주경력이 다들 50년 안팎인 노장들은 대개 고교 브라스밴드로 또는 친구의 권유로 재즈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요즘처럼 화성학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교육이란 전혀 없었다. 이름난 재즈 LP를 듣고 따라서 연주하다가 미8군 무대에 발탁돼 음악인생을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그때 베이스 줄이 없어서 검은색 전화기 줄을 베이스에 묶고 연주했었다", "색소폰을 다들 '곰방대처럼 생긴 악기'라고 불렀다"고 옛날 얘기를 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날 촬영에서 피아노는 임인건, 베이스는 전성식이 연주했다. 이른바 '재즈 2세대'들이다. 영화에는 이들 외에도 박재천·미연 부부, 이정식, 웅산, 이주한 등 후배 뮤지션들이 대거 출연할 예정이다. 19일에는 서울 삼성동 재즈파크에서 이들 전체가 출연하는 공연이 열리고, 그날 '더 콘서트'는 마지막 촬영을 할 계획이다.

이날 촬영은 매번 감독의 "컷!" 소리보다 엑스트라로 참여한 재즈팬들의 박수가 먼저 터졌다. 촬영을 마친 뒤 클라리네티스트 이동기씨는 약간 부족한 듯한 얼굴이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클럽에서 연주를 하지만, 오늘 연주는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네요. 영화로 남기는 거니까."





(C) 조선일보,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입력 : 2009.12.29 03:32 / 수정 : 2009.12.29 08:37